역사

성지순례 - 명동성당(명동 주교좌 성지 성당) 001

leorho 2025. 9. 24. 14:26

성지순례를 시작하며 — 명동에서 울린 첫 종소리

새벽의 공기가 아직 차갑던 시간, 가볍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전철 4호선—낯익은 일상의 궤도를 따라—나는 오늘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길로 향했다. 목적지는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한국 천주교사의 굵직한 장면들이 겹겹이 쌓인 그곳에서, 내 성지순례도 첫 페이지를 펼친다.

명동 주교좌 성지 성당

왜 명동에서 시작하는가

성지는 사건의 장소다. 명동은 박해의 기억(크립트), 근대의 상징(고딕 벽돌 성전), 그리고 **시민사회의 양심(민주화의 현장)**이 한 좌표에 포개진 지점이다. 교회의 시간과 도시의 시간이 교차하는 그 현장에서 출발하는 일은, 앞으로 이어질 모든 순례의 방향과 깊이를 정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오늘의 여정

  • 이동: 오전 7시, 집에서 출발 → 전철 4호선 환승 없이 명동 하차
  • 미사: 오전 10시 미사 참례 — 종소리가 도심의 소음 사이로 길을 내어 주는 시간
  • 성지 탐방: 미사 후 곧장 **지하성당(크립트)**로 내려가 묵상. 병인박해와 순교의 이름들을 다시 읽는다.
  • 스탬프: 본당 사무실에서 스탬프를 받으며 ‘오늘의 발걸음’을 기록한다. 작은 도장 하나가, 길고 단단한 기억의 앨범을 한 장 더 넘긴다.
  • 동선 예고: 오후에는 명동–종로 일대 → 가회동성당 → 광희문 → 서소문으로 잇대어 걷는다. 도심의 공기 속에서 순교의 자취가 이어진다.

현장 스케치

대성전 안은 낮은 호흡으로 가득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은 오전의 빛을 받아 더 투명해졌고, 기도문 사이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마저도 하나의 응답처럼 맺힌다. 지하성당에서 오래된 이름들을 읽을 때, 그 ‘옛 이름들’이 내 ‘오늘’을 붙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선택은 한 시대의 이야기였지만, 나의 선택은 지금 여기서 다시 이어져야 한다는 것.

이 순례의 방식

이번 순례는 단순한 ‘방문 기록’이 아니다.

  • 역사와 동시대의 맥락을 함께 엮어 읽고,
  • **현장 정보(접근, 스탬프, 미사 시간, 주차/대중교통)**를 정확히 정리하며,
  • 사진·고증 자료·AI 재현 이미지를 나란히 놓아, 눈으로도 그 시대를 복원해 보려 한다.
    각 성지 글은 사건–사람–장소라는 세 개의 축으로 정리하고, 순례 일정 글은 동선·체류시간·체력관리 중심으로 따로 묶을 것이다. 오늘의 이 글은 그 첫 장이다.

오늘의 한 줄 묵상

“발걸음이 기도가 되게 하소서. 이름을 부르고, 역사를 기억하며, 오늘의 선택을 두려움 없이 하게 하소서.”


지하성당

 

천주교서울대교구주교좌명동대성당은 명실공히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이곳은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기도 하다. 2천 년 교회사 안에서 유례 없이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 스스로의 손으로 창립됐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한 뒤 귀국한 때로부터 치지만 그보다 4년이 앞선 1780년 1월 천진암에서는 권철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당시의 저명한 소장 학자들은 천주학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 해 가을,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고 자신의 집에서 교회 예절 거행과 교리 강좌를 열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도 한복판에 겨레 구원 성업의 터전을 닦았고 바로 이곳에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산 역사인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훈, 정약전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됐으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형조 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각돼 김범우가 경상도 단장으로 유배되면서 해체됐다. 그 후 1882년 명동은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에 의해 성당 터로 매입된다. 블랑 주교는 이 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이 때 신자들은 손수 팔을 걷어 붙이고 정지 작업에 나섰는데 
블랑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들의 신앙적 열성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남자 교우들은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놀랄 만한 열성을 쏟았고 그들은 신앙과 만족감에서 추위로 언 손을 녹일 정도로 참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들의 열성으로 시작된 주교좌 명동대성당의 정지 작업은 풍수 지리설을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4년이 지난 1892년 5월 8일에 가서야 기공식을 갖는다. 그 사이 초대 주임 블랑 주교가 1890년 선종하고 두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성당 설계와 공사의 지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았는데 그는 약현(현 중림동)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았다. 
코스트 신부가 1896년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프와넬 신부에 이르러서야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짓고 드디어 1898년 5월 29일 성신 강림 대축일에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역사적인 축성식을 가졌다.  

기공 후 무려 12년만에 완공된 주교좌 명동대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해 기해년 1839년 9월 12일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의 형을 받은 후 한강변 모래밭에 매장됐었다. 순교한지 약 20일 후 칠팔 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세 분의 유해를 거두어 지금의 서강 대학교가 소재한 노고산에 4년간 매장했다. 그 후 유해는 1843년에 삼성산으로 이장됐다가 1901년에 이곳으로 모셔졌다.